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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Node와 Pod와 Container


Container(컨테이너)란?

  • Application 구성 요소 하나를 실행하는 가상화된 환경.
  • Kubernetes에서는
    • 사용자가 Container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 Container는 Pod에 속하게 되고
    • Pod는 Container를 관리한다.

Pod(파드)란?

  • Kubernetes의 기본 단위.
  • Cluster를 이루는 노드 중 하나에서 실행.
  • 일반적으로 Pod 하나는 Container 하나를 포함(1:1).
  • 설정에 따라 1 Pod에 여러 Container가 존재할 수 있다(1:N).
  • 하나의 Pod에 포함된 모든 Container는 동일한 가상 환경에 포함을 의미.
    • 같은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localhost로 서로 통신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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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cker Desktop에서 Kubernetes 기능 활성화


1.1. 우측 상단의 톱니바퀴 아이콘 클릭



1.2. 좌측 메뉴의 ‘kubernetes’ 선택 후, ‘Enable Kubernetes’ 체크박스 선택

  • Docker Desktop이 자체적으로 kubernetes를 내려받아 단일 노드 클러스터(Single Node Cluster)를 실행한다.

1.3. ‘Reset Kubernetes Cluster’ 버튼 클릭

  • Kubernetes Cluster에서 모든 Application, Resource가 제거되고 초기 상태로 reset된다.

1.4. 우측 하단의 ‘Apply & Restart’ 버튼 클릭

1.5.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면 화면 좌측 하단의 docker, kubernetes 아이콘 박스가 초록색으로 나타난다. (만약 kubernetes 아이콘 박스가 빨간색으로 나타나면 1.3.을 다시 실행 후 아이콘 박스를 확인해본다.)


Ref.] 리눅스 OS 환경을 사용 중인 경우, 단일 노드 클러스터를 실행할 수 있는 방법
  • K3S (K8S 대비 절반 정도의 용량을 차지)
  • Kind(Kubernetes IN Docker)
  • Minikube


2. 생성된 클러스터 확인

C:\\Users>kubectl get nodes
NAME             STATUS   ROLES           AGE    VERSION
docker-desktop   Ready    control-plane   7m3s   v1.27.2

클러스터를 구성하는 노드의 기본 정보가 위와 같이 출력된다.

클러스터의 상태(status)가 ‘Ready’이면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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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

내가 속한 개발팀은 나 포함 5명이다. 현재는 나만 한국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대만 멤버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국에서 정식으로 토익시험 한번 보지도 않은, 모의시험조차도 한번 보고 점수는 신발사이즈처럼 나왔다. 물론 아예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브로큰 잉글리시를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싱바커(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잔 사먹을 정도의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의사소통응 하고 팀장으로서 팀원에게 업무분배 및 지시를 할 때가 생기면 무척 애를 먹는다. 많은 경우,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직원의 도움을 받지만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말을 안하고 진행할 수는 없어 급한 경우에는 직접 전하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것이 서로 사용하는 외국어가 제한적이다보니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 제대로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중간 체크를 하는 경우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 내가 서투른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하고 멤버가 역시 서투른 영어를 사용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괴리감은 업무 문화의 차이다.
 
한국의 빨리빨리문화와 너무도 다른 대만의 업무 문화

2018년 9월 중순부터 회사에 합류하자마자 클라이언트 회사와의 연동을 위한 개발을 진행해야 하는 업무이슈가 있었다. 내가 속한 회사의 서비스에서 oAuth 인증 등의 API 를 제공해야 하는 이슈가 있었고 일정이 빠듯해서 합류하자마자 매일 야근을 하며 일을 했다. 그러는 중, 어느 날 팀원 한 명이 내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고 ㅇ얘기해주면서 걱정되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나에게 더 건냈다. “ jinwon,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연장될거야. 너무 애쓰지 마” 그 한마디가 그 때 참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걱정해서 그런 얘기를 해주는 것은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팀장이 아닌, 같은 팀원 입장이었기 때문에 존 더 쉽게 그런 얘기를 해주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경험해왔던 업무문화, 동료의 사고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 때 회사의 입장도 멤버가 무리하면서 진행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었찌만 불가피하게 일정을 맞춰야 하는 경우에는 야근이 불가피했다. 이 문화가 내가 팀장역할을 맡게 된 후 자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요소가 되었고 지금도 어떻게 하면 멤버들에게 업무와 일정을 이해시키고 동기부여를 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업무에 대한 적극성의 차이

또 다른 어려움은 멤버들과 팀장간의 적극성의 괴리감이다. 이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중 하나이기도 한데 어떤 업무에 대해 지시를 하면 물어보기 전까지는 피드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업무 중 이슈가 있어도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서비스 오픈 시점이 임박했을 때 여전히 업무가 많이 남아있어 (사실 제자리 상태인 경우도 종종 있다.)직접 야근하면서 처리를 한 경우도 자주 있엇다. 분명 얘기할 때는 이해했다고 했는데, 팀장이 팀원에게 중간에 이슈가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회사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속한 회사에서는 상하관계 문화가 강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칼퇴문화도 자연스럽고 경직된 분위기는 한국에 비해 훨씬 덜한 편이다. 최근 몇 년전부터 뜨거운 인기 키워드인 워라벨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칼퇴 문화와 한국보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보다는 덜 타이트하다는 점은 분명 좋은 점이다. 그러나 ( 앞서 말했던 케이스와 같이) 업무의 마감일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리더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이러한 요인이 이따금 생각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데 팀원들이 리더를 리더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무시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끔되는 씨앗이 된다. 그리고 이는 관계의 어려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분명 서로 다른 국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데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핖수불가결하다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니어 레벨이라고 판단되는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하지 않고 리더가 구체적인 업무의 틀을 얘기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상세히 이 업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자체를 얘기해줘야 일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보다는, 자신의 의견과 팀장의 생각이 일치하는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다. 그렇게 해도 자신은 팀장이 제시한 방법이 납득되는 방법이 아닌 것같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대표님이 추구하는 방향은 “의사소통은 수평적으로, 업무는 수직적으로”였다.
언뜻보면 멤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아예 자신의 얘기를 하지는 않는 부분에서는 이상적인 방향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같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조차도 낮선땅에서 일을 시작할 때 그 나라의 분위기, 스타일,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큰 괴리감을 느꼈듯이 진출하려고 하는 나라의 문화, 특히 근로 문화 및 스타일을 알려고 노력하고 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여행과 생활은 달라요

이전에 여행 그리고 단기선교로 왔을 때 느꼈던 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생활하고 회사내 업무를 해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나라를 여행하거나 TV 너머로 해당 국가의 특정 도시를 보면서 환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유럽여행을 시도하면서 단 하나의 국가이긴,ㄴ 했지만 다녀왔던 오스트리아를 생각하면서 아.. 이 나라에서 생활하면 자주 빈슈타츠오퍼의 오페라, 오케스트라 연주를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여유로운 분위기, 청명한 하늘과 뭔지 모르지만 역사가 느껴지는 도시 곳곳의 분위기 등등.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아내에게 칭얼거린 적인 종종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만약 생활한다면 불편함으로 다가왔을 내용이 역시 꾀 많았을 것 같다. 9시도 되기 전에 문을 닫는 식료품점과 식당들, 다소 비싼 식사 가격,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다수의 경우 독일어를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들 등등. 여행에서 느꼈던 가벼운(?) 불편함들이 일상으로 다가왔을 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대만에 일주일 일정으로 오갈 때 세번씩은 꼭 먹었던 나의 ,사랑 우육면이 이제는 무심하게 지나쳐지는 것처럼 오스트리아를 갔다고 해도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그 나라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며 이를 하는 일상은 어떨까 생각하면 마냥 행복하다고 애기할 수는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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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도 약간의 휴직기간을 가진 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복귀 이후에도 역시 바쁜 일상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은 우한폐렴(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이다.
 
본래 1개월에 한번씩 대만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2019년 1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대만-한국 간의 왕래가 사실상 힘들어졌다.(대만입국시 14일 격리, 한국입국시 14일 격리로 약 1개월을 자가격리로 보내야 한다.) 
 
역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같다. 물론 몸은 편하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느껴지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교회.집사님들과 식사 후 대화를 나누던 중 어느 분께서 나에게 혼자 지내는 생활이 어렵지않으냐고 물어봐주셨다. 최근에 회사일로 머리가 아프고 우울감이 찾아오긴 했다. 근데 혼자 지내는 게 처음에 걱정했던 것 만큼 우울감이 심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사람에 대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꽤 괜찮은 것같다.내성적 성향이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미안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가족들 곁에 자리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크게 다가온다.그리고 우울감이 찾아올 때 그 미안함과 역할을 자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꽤 크게 느껴진다.
 
내 편이 곁에 없다는 것, 떨어져 있다는 것이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부분인 것 같다. 
이 글 을 쓰고 있는 날은 5/17. 덥고 습한 전형적인 대만 날씨이다. 맑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장대비가 내리고 또 금새 먹구름이 걷히기도 한다.
장대비가 잠시 쏟아지고 난 후의 하늘이다. 파란 하늘과 먹은 먹구름이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룬다.비가 안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금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비가 오는가 하면 금새먹구름이 지나갔나 싶었는데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한다. 
팀장으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갑자기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고 어려움이 해소되었나 싶었는데 또 다른 어려움의 파도가 다가오기도 한다. 같은 동양권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르게 느껴지는 문화, 그리고 외국인으로서의 차이, 언어의 어려움, 의사소통의 한계로 발생하는 오해와 스트레스는 계속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그리고 하나고 같은 파도는 없듯이 어려움도 항상 다르게 찾아온다. 그럴 때, 내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거창한 목표나 미션이 있지 않더라도 그 자신으로부터의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을 때 마음이 어려워진다. 나의 경우는 지금의 내가 그렇다고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황적으로, 교회 설교를 통해서 나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어지고 있다고 느껴져 그에 따르려고 하고 있다. 뭐.. 정답이어서, 정답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 길을 가는 것만은 아닌 것같다. 흔들릴 때가 있다.그 때에 어떠한 모양이든 지원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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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1 노동절. 전 세계의 노동자들의 날인 노동절. 어렸을 때에는 아저씨들이 시내에서 시위하고 신문에 나오는, 전투적인 날이라고 생각되었던 날. 김부사장님의 제안으로 타이페이 인근의 라오메이 해변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오랫만에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은 갈치의 비늘이 빛에 반사되어서 반짝이는 것처럼 바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찰싹거리는 파도소리를 따라 고개를 속여 아래를 보니 바닷바위들이 파도를 마주하고 있었다. 한번도 같은 모양이 없는 파도. 매번 새로운 파도 물결이 바닷바위를 향해 오는데 바위는 그냥 그 자리에서 수 많은 파도물결을 받아들이고 있다. 단순히 작은 바닷바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머릿속에 작은 울림이 울리는 것같았다. 
 
부사장님도 리더로서 갖는 어려움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물론 있지만 내가 겼었던 어려움과 결을 같이 하는 부분들이 있어 한편으로는 외로운 어려움이 아니구라 라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어려움은 외국이라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다시 한번 들었다.
 
나는 내가 리더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직이 원하고 상황이 그렇다면 내가 피할 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리더로서 부족한 면은 있지만 점차 개선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기사를 보다보면 시즌 중이든 스토브리그이든 예상치 못한 감독경질 및 선임기사를 보게 된다. 때로는 최연소 타이틀을 가지는 감독도 있고 코치 경험없이 바로 감독에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그 기사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한국에 10개 밖에 없는 자리이고 야구판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가 감독의 자리이지만 감독이 일찍 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물론 항상 감독이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안이 온다면 나같이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감독으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단순한 리더로서의 철학 조차도 없는 사람이라면 롱런하기 어려운 것같다.
 
대만에 와서 약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실장남과 부사장님은 나에게 팀을 맡아줄 것을 제안해주셨다. 업무 문화도 다르고 서로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도 통역이 없으면 원활하게 진행하기 어렵고 무엇보다도 내가 준비되어있지 않다라는, 자신이 없어서 고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올 때 어느 정도 나에 대해 그 부분의 기대감을 가지고 채용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리더로서 생각하는 이상향이 있었다. 말로 지시만 하고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업무의 오너십이라는 말로 팀원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전가하고, 잘 되면 공을 가로채는 리더는 되지 말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1. 서번트 리더십을 보여주자. 업무지시를 하지만 같이 고민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케어해주고 내가 먼저 본(sample)이 되자.내가 하기 싫은 것을 팀원에게 지시하지 말자.
  2. 그리고 동기부여를 잘 하는 리더가 되자라는 것이었다. 팀원이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하고 팀원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자.
 
이상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언제나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말야구교실코치를 시작하던 첫날 첫 5분 사이에 느꼈던 이상과 연실의 괴리감이 리더를 맡고 나서도 유사하게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느새 팀원들은 본인이 업무를 완전히 매조지짓지 않아도 팀장이 알아서 마무리 하겠지. 플랫폼 장애가 발생해도 매뉴얼대로라면 또 지시한 대로라면 로테이션에 해당하는 멤버가 대응을 해야하지만 본인이 안하면 팀장이 대응을 하겠지 등의 생각을 갖게 된 것같아 보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어느 영화의 대사가 떠오르게 되는데 “호의가 계속 되면 당연한 권리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노하게 되고 배신을 당한 기분마저 든다. 힘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멤버들을 향한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을 하는 상황이 늘어가는 것이다.
 
한가지씩 작은 부분부터 다시 맞춰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멤버들이 문서화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로 보이나 회사 팀 업무를 위해서는 매뉴얼, 문서화가 분명 필요한 부분인데 어떻게 작성을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문서의 레이아웃을 잡고, 예제를 작성해서 제공하는 식으로. 그러나 또 언젠가는 이런 노력들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공허감, 허탈함, 배신감, 그리고 자책감과 우울감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지난 노동절 라오메이 해변의 어느 바닷바위처럼 일희일비하지않고 그저 그 파도들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그런 리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에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들이 생기면서 다 정리하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주일 설교 시간에 버티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 바닷바위가 오버랩이 된다.
 
우직함. 정중동. 그것이 필요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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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3개월간 혼자 대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7월에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약 1년간은 육아휴직으로 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간이 확보가 되었던 상황이었다, 우선 혼자 대만에 오기는 했지만 가족들이 일년간 지낼 집을 구하는게 가장 큰 과제였다. 
 
가족들이 지낼만힌 집을 구하는데에 아내가 희망하는 조건들이 있었다. 첫째는 인근에 소아과가 있어야 했고, 둘째는 인근에 대형마트가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1살, 3살로 굉장히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유아식을 직접 만들어 먹여야 했다.
그래서 식재료를 구하기 쉬워야 했는데 일반시장에서도 장을 볼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 않은 채소나 육류도 있을 수 있고 잘못먹여 탈나면 고생이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트를 선호했던 것같다.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이 인근에 존재하는지도 중요했다. 당연 월세 비용또한 고정지출이기 때문에 납득이 가능한 금액이어야 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전세 개념이 없고 집을 구입하는 가격이 한국 특히 서울 아파트 가격 못지 않기 때문에 매매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월세집을 구하는 것인데 4인가족 기준으로 찾아보려니 쉽지 않았다. 몇 군데 지역을 정해두고 온라인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만에도 부동산 관련 웹서비스가 있는데 그중 591.com이라는 서비스를 이용해 찾기 시작했다. 몇 군데 찾아보다가 아내의 지인인 민00선배가 가족과 대만에서 살았던 아파트를 검색할 수 있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내에 헬스장, 무용실, 탁구대, 야외 수영장, 야외 온천 등이 있는 리조트 느낌의 아파트였다. 사진으로만 보고서는 아..우리도 이런 곳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라고 아내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아파트가 검색되니 신기했다. 가격이 문제였는데 한국돈으로 약 120만원 정도의 비용이 나간다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납득이 되는 가격이었다. 왜냐하면 매매가격이 대략 한국돈으로 8억이 조금 넘는 금액부터 시작이었는데 그 가격에 월세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도움을 통해 계약도 마무리 짓고 아내는 한국에서 해외이삿짐업체를 통해 짐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퇴근 후 주중 저녁과 주말에 부지런히 셋팅을 하고 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 시기에는 한국에서는 미세먼지가 굉장히 심해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걱정이 많았던 때였는데 대만은 비교적 미세먼지에 대한 어려움은 적어 하루 빨리 아내와 아이들이 건너오길 바랐다. 그리고 비록 잠시이지만 아읻르이 태어나기 전, 아내와 함꼐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와 비교가 다소 심한 한국을 벗어나서 아이들에게 외국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컸다.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퍼즐이 하나씩 맞혀져 가는 기분이었다.
 
12월 23일. 가족들이 대만으로 오는 날이다. 가족들을 픽업하러 공항에 나가 기다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언천공항에서 기다리는게 아니고 외국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는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 묘한 기분이었다.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조금 더 앞서는 기분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내와 동생이 찻째와 둘째를 데리고 입국장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는 그냥 모든 것이 고마웠다.아내와 이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리고 아내도 기대했던 장기간의 대만생활에 대해 장및빛 기대감을 가지고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는 약 9개월간 대만에서 생활을 했는데 생활 시작 전에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주 아파서 소아과나 응급실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특히 아내의 아이들 건강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러나 대만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병원에 간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내 단독으로 아이 둘을 봐야만하는 시간이 아내를 힘들게 했다. 분명 아이가 한 명만 있을 때와는 달랐다. 첫째는 밥을 잘 안먹었고 잘 안먹다보니 나중에 배가 고파서 칭얼거리고 졸려서 낮잠을 자다가도 배가 고파져 깊이 잠에 들지 못하고 울면서 일어나 아내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그렇다고 다시 음식을 주면 잘 먹는 것도 아니니 첫째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어려움은 감정선의 폭발로도 이어지기 일쑤였다. 둘째는 너무 어어린 아기여서 손이 많이 갔고 유아식도 만들어야 하고 설겆이도 해야하고 우리가 먹을 음식도 하려했고 그 사이에 첫째는 심심하다고 청얼거리니 아내가 정말 힘이 들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아내의 얼굴은 생기를 잃어갔고 우울감이 몰려오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했고 회사에서는 회사일과 팀원들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우울감이 심하게 오곤 했다.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이니 이제는 아이들이 자겠지라고 생각하며 문을 여는데 어둑한 사이로 첫째가 다다다다 아빠~하며 뛰어온다. 아내는 차라리 더 늦게 오라고, 아이들 거의 다 재웠는데 다시 시작해야 되지 않냐며 화를 낸다. 아내에게 서운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내가 고생했을 것들 생각하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예상보다 한국에 더 일찍들어가기로 했을 때 아내가 이렇게 얘기하면서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조금 큰 상태에서 왔으면 좀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텐데..”
아기를 데리고 해외생활을 하는 것은 정말 하드코어인 것같다.
가족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해외 취업, 해외 근무를 희망했었는데 이상과 현실은 역시 달랐다, 물론 힘들기만 했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만에는 '친쯔관'이라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놀이 공공시설이 있다, 지역별로 있는데 여기서 대만인 부모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한국보다는 좀 더 많았고 아이들과 어딘가 나들이를 나갈 때 차를 소유하지 않았으나 택시나 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 한국보다 편리해서 외출을 자주 다닐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즐겁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파트 단지 내 야외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즐기고 덕분에 물에 대한 공포감이 컸던 아내와 첫째 딸은 물을 좀 더 친숙하게 여기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다. 이상을 꿈꾸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직면한 현실을 대면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같다. 가족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한국에서 복직했다. 아내 의견대로 아내는 일을 해야 힘이 나고 리프레시되는 것같아보인다.
아빠는 외국에, 가족은 고국에 있는 역 기러기 아빠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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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시티에 위치한 회사와의 화상 인터뷰 후에 한동안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냈다. 나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은 이상을 꿈꾸고 있는데 현실은 외국어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이라니.. 자책감과 무기력함이 큰 파도처럼 밀려와 덮친 것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 아이가 태어나 가족은 4명이 되었고 회사는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내가 팀의 리더역할(파트장 내지는..) 을 해주길 바랐다. 나 또한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이직을 하게 되었다. 모 대기업의 비지니스 파트너(현실적으로는 을의 입장) 으로서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의 백앤드 개발자로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약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전환점이 생기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개발자가 업무요건을 받아 개발을 하고 나면 테스트 환경에서 검증을 하고 대기업 매니저가 한번 더 검수를 하게 된다. 그 때 담당 개발자가 대기업 매니저에게 브리핑을 하고 이상 없으면 실제 서비스 환경에 반영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어느 날은 대기업 매니저의 검수하는 날 담당 매니저가 부재하게 되어 다른 서비스 담당의 노령의 매니저가 검수를 하게 되었는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승인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본인이 얘기하는 방법대로 수정을 해서 다음 날 다시 오라는 얘기를 했다. 명백한 갑질이었다. 울먹이는 후배 개발자도 있었고 그 회의실에 들어갔던 멤버는 모두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그 날 팀장님의 부모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나는 후배들에게 수정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조문하러 가자고 했다. 그 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고민과 더불어 더러운 갑질 문화가 있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일하기 싫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뜬금없는 채용정보와 희망없어보이던 경쟁률

이번에는 한국의 채용사이트부터 (이전에도 계속 검색해왔지만) 먼저 보기로 생각하고 앱을 실행했다.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 싶어 새벽1시가 넘은 시간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앱을 켜고 벽에 등을 기대고 검색을 해보는데 평소에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대만의 개발자 채용 소식에 하나의 공고가 올라왔다. 막연하게 아내와 함께 대만생활에 대해 상상했던 대화들도 오버랩되고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희귀한 개발자 채용공고라 신기함과 기대를 가지고 창을 열었다. 웹 플랫폼 개발자의 채용공고였는데 경쟁률이 내 기억으로는 약 1:36 정도였다. 아.... 나에게 기회가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 시작이 있어야 끝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지원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얼마동안은 기약없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갑질 당하는 을의 생활을 버텼다.
 
채용 인터뷰 요청과 합격 소식 그리고 고민

약 2주 정도 지났을까 메일이 한 통 날아왔고 채용인터뷰를 진행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원했던 회사는 대만 로컬회사였지만 매니저급 이상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인터뷰를 진행할 분도 같은 한국인이어서 언어적인 면에서 어려움은 없었다. 일반적인 기술면접이 진행되고 몇 일 후 임원 면접을 겸한, 실질적인 조건에 대해 논의를 하는 2차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연봉이나 기본 복지가 한국보다는 다소 낮은 조건이었지만 현지 급여수준 등을 생각하면 많은 배려를 받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고민되었던 것은 생활비였는데 우리나라 기업에서 해외로 주재원신분으로 간다면 체제비 등의 생활 수당을 추가로 받을 수 있지만 현지 기업에 채용되는 조건이어서 체류비용이 개인 부담이었다. 어쨌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아내와 상의했다. 결혼 이후 비합리적인 상사의 정치, 내지는 갑을 관계의 상황에서 처한 부당함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아내는 나의 상황에 안타까워했었고 나를 배려해주는 얘기들을 해주었다. 아내 역시 나를 만나기 전 대만에서 약 한달동안 생활해봤지만 생활로서 경험해보지는 못해 육아휴직기간동안 같이 대만에서 지낼 기대감이 있다고 앴다. 그러나 처녀떄와는 달리 아이둘을 데리고 외국에서 가장 힘든 육아 기간을 보낸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아내는 나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 고민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거절한다면 나중에 또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두려워하며 계속 회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했으니 응답에 대해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만의 회사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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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생활을 꿈꾸는 자

아내와 레바논을 다녀오고 난 후 나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아내에게 만나자고 얘기하고 고백을 한 적이 있다. 한 달이 되었을 때쯤 교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즈음에 아내의 직장에서 카자흐스탄에 몇몇 동료들과 함께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아내왈 레바논, 타자흐스탄, 대만 한 국가씩 돌아가면서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국가는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였기 때문에 전혀 감도 없고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내가 원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도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아쉬움 그리고 여전한 갈증

한편으로는 한 국가라도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점점 커지면서 군 복무할 때 선임이자 또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대학교에 지원했던 기억과 그보다 더 이전에 중학교2학년 재학 중에 부모님께 캐나다로 유학 보내달라고 몇년간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각각 다른 이유들로 무산이 되기는 했지만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그래서 군 복무 기간동안 주말이 되면 TV리모컨은 후임에게 건네주고 행정반 컴퓨터 앞으로 가 인트라넷으로 제공되는 영어 작문 강좌를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영작 연습을 했었다. 개발자로 일하기 시작한지 약 5년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링크드인과 스택오버플로 등을 통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지원도 직접 해보았다. 여전히 무모한 도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약에..라는 부질없는 가정

7년 전까지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모태솔로였을 때에는 만약 내가 결혼을 하면 개인 프로젝트 못할 것같고, 유럽여행은 더 못할 것 같고, 해외진출 시도는 더더욱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아내와 만나 교제하고 결혼해서 개인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유럽에 현장조사라는 명목으로 다녀올 수 있었고, 그 프로젝트의 소스코드를 github.com에 올려놓게 되면서 생각지도 않게 스페인의 헤드헌터에게서,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는 회사에서, 말레이시아의 통신회사 등에서 인터뷰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지레짐작해서 포기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지지해주는 아내에게 무척 고마웠고 지금도 여전히 너무 고맙다.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꿈도 중요하지만 가족의 지지와 동의가 없다면 해외생활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의 우선순위보다도 가족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고민해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한계 그리고 고민

그러나 번번이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였는데 유창한 영어가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간혹 아마존, 구글같은 정말 큰 회사들 혹은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큰 규모인 부킹닷컴 등과 같은 글로벌하고 인기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된 분들의 후기를 ,페이스북의 그룹에서 보면서 몇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영어도 중요하지만, 아주 잘 하지는 않아도 알아듣고 유려하지 않아도 내 의사를 어떻게든 전달할 수 있으면 기회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발자로서의 기본기, 그리고 기술 면접이 정말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베트남에 개발조직이 있고 본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타트업에서 인터뷰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인터뷰는 보고 싶다는 의사를 메일로 전달하니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회사 업무가 끝난 시간이 되고 개인 노트북을 챙겨 후다닥 인근의 카페로 달려가 구글 행아웃으로 진행될 인터뷰를 준비했다. 사실 몇일동안 궁금한 것에 대해 영작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마침내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메일로 연락을 해왔던 인사팀의 멤버가 인사를 하며 회사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질문들을 하며 답변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약 한시간 조금 안되게 진행되었는데 기술면접을 진행하게 된다면 얼마나 더 히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노트북을 닫는 순간 긴장간이 풀리면서 현실적으로 해외근무늩 힘든걸까, 내 마음도 접어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몰려와 괴로웠다. 내가 상대방의 얘기를 알아듣고 있기는 했던걸까... 자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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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에 시리아 난민 긴급 구호 겸 선교활동을 일주일간 다녀온 적이 있다.
거짓말같이 일정이 지연되면서 약 이틀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열심히 난민사역을 하던 팀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인근 여행을 하면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적이 있다. 그 때 지금의 아내와 대만선교에 대한 서로의 경험과 추억을 얘기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는데 서로 교제 전이었지만 공통화제는 대만에서 살아본다면 이라는 전제로 한 대화였다. 단기선교를 통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생활해본다면 이라는 상상은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누고 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그 자매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하게 되었고 11개월 후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만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신베이 (한국으로 치면 서울 근교의 경기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자바 프로그래머로 플랫폼 개발 팀을 리딩하는 위치에 있다. 막연한 상상이 어느새 현실로 자리잡은 것이다. 
 
꿈이 이뤄졌다. 그러나 일상이 항상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다. 지내보니 여기만의 장단점이 있다. 한국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여기서는 해소된 부분들도 분명 있다.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이슈들도 있다. 우리가 바라는 부분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아니 대부분 희망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로또를 맞는 상상, 2주간의 휴가가 생겨 버킷리스트에 있던 여행지를 여행하는 것, 멋진 이성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외국회사에서 인텔리한 모습으로 외국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 등. 사람들마다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행복함을 동반한 상상이 이뤄지면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부분도 있겠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충돌(콜리전)이나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부분들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이 글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작성해보는 이유는 나름대로의 외국생활을 하면서 느낀 부분에 대해 다시 돌이켜보고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보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막연히 외국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않고 이성적, 객관적으로 고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지금 당장 외국생활에 대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마치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 영화, 내지는 드라마로 간접적 체험을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글이 보편적인 외국생활에 대해 설명하는 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고 생활하는 한 사람으로서 겪고 느낀 부분을 서술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과 공유하면서 아..이런 부분들이 있을 수 있구나 라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분명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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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gue  Description


고등학교, 대학, 사회인 야구로부터 선수가 참가해,
리그전・연습을 장기간으로 실시하는, 새로운 트라이아웃입니다.

2022 JWL

참가 선수 전원이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포지션별로 팀을 나누고 리그전을 진행합니다. 

2022년에는 11월 24일~12월 25일의 기간 중,
- 1일째에 체력 측정,
- 2일째에 연습을 실시해 참가자의 데이터 수집과 팀 분할을 실시,
- 3일째부터 1팀 20명의 6팀으로 나뉘어 총당 리그전을 진행했습니다.

2023 JWL

League Schedule (기간) 2023.11.25 ~ 2023.12.24
Location (장소) OKINAWA
Registration Schedule (등록기간) 2023.08 ~
JWL Homepage https://www.japanleague.co.jp/
구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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