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족과의 외국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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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과의 외국 생활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3개월간 혼자 대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7월에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약 1년간은 육아휴직으로 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간이 확보가 되었던 상황이었다, 우선 혼자 대만에 오기는 했지만 가족들이 일년간 지낼 집을 구하는게 가장 큰 과제였다. 
 
가족들이 지낼만힌 집을 구하는데에 아내가 희망하는 조건들이 있었다. 첫째는 인근에 소아과가 있어야 했고, 둘째는 인근에 대형마트가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1살, 3살로 굉장히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유아식을 직접 만들어 먹여야 했다.
그래서 식재료를 구하기 쉬워야 했는데 일반시장에서도 장을 볼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 않은 채소나 육류도 있을 수 있고 잘못먹여 탈나면 고생이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트를 선호했던 것같다.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이 인근에 존재하는지도 중요했다. 당연 월세 비용또한 고정지출이기 때문에 납득이 가능한 금액이어야 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전세 개념이 없고 집을 구입하는 가격이 한국 특히 서울 아파트 가격 못지 않기 때문에 매매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월세집을 구하는 것인데 4인가족 기준으로 찾아보려니 쉽지 않았다. 몇 군데 지역을 정해두고 온라인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만에도 부동산 관련 웹서비스가 있는데 그중 591.com이라는 서비스를 이용해 찾기 시작했다. 몇 군데 찾아보다가 아내의 지인인 민00선배가 가족과 대만에서 살았던 아파트를 검색할 수 있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내에 헬스장, 무용실, 탁구대, 야외 수영장, 야외 온천 등이 있는 리조트 느낌의 아파트였다. 사진으로만 보고서는 아..우리도 이런 곳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라고 아내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아파트가 검색되니 신기했다. 가격이 문제였는데 한국돈으로 약 120만원 정도의 비용이 나간다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납득이 되는 가격이었다. 왜냐하면 매매가격이 대략 한국돈으로 8억이 조금 넘는 금액부터 시작이었는데 그 가격에 월세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도움을 통해 계약도 마무리 짓고 아내는 한국에서 해외이삿짐업체를 통해 짐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퇴근 후 주중 저녁과 주말에 부지런히 셋팅을 하고 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 시기에는 한국에서는 미세먼지가 굉장히 심해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걱정이 많았던 때였는데 대만은 비교적 미세먼지에 대한 어려움은 적어 하루 빨리 아내와 아이들이 건너오길 바랐다. 그리고 비록 잠시이지만 아읻르이 태어나기 전, 아내와 함꼐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와 비교가 다소 심한 한국을 벗어나서 아이들에게 외국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컸다.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퍼즐이 하나씩 맞혀져 가는 기분이었다.
 
12월 23일. 가족들이 대만으로 오는 날이다. 가족들을 픽업하러 공항에 나가 기다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언천공항에서 기다리는게 아니고 외국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는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 묘한 기분이었다.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조금 더 앞서는 기분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내와 동생이 찻째와 둘째를 데리고 입국장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는 그냥 모든 것이 고마웠다.아내와 이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리고 아내도 기대했던 장기간의 대만생활에 대해 장및빛 기대감을 가지고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는 약 9개월간 대만에서 생활을 했는데 생활 시작 전에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주 아파서 소아과나 응급실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특히 아내의 아이들 건강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러나 대만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병원에 간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내 단독으로 아이 둘을 봐야만하는 시간이 아내를 힘들게 했다. 분명 아이가 한 명만 있을 때와는 달랐다. 첫째는 밥을 잘 안먹었고 잘 안먹다보니 나중에 배가 고파서 칭얼거리고 졸려서 낮잠을 자다가도 배가 고파져 깊이 잠에 들지 못하고 울면서 일어나 아내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그렇다고 다시 음식을 주면 잘 먹는 것도 아니니 첫째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어려움은 감정선의 폭발로도 이어지기 일쑤였다. 둘째는 너무 어어린 아기여서 손이 많이 갔고 유아식도 만들어야 하고 설겆이도 해야하고 우리가 먹을 음식도 하려했고 그 사이에 첫째는 심심하다고 청얼거리니 아내가 정말 힘이 들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아내의 얼굴은 생기를 잃어갔고 우울감이 몰려오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했고 회사에서는 회사일과 팀원들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우울감이 심하게 오곤 했다.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이니 이제는 아이들이 자겠지라고 생각하며 문을 여는데 어둑한 사이로 첫째가 다다다다 아빠~하며 뛰어온다. 아내는 차라리 더 늦게 오라고, 아이들 거의 다 재웠는데 다시 시작해야 되지 않냐며 화를 낸다. 아내에게 서운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내가 고생했을 것들 생각하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예상보다 한국에 더 일찍들어가기로 했을 때 아내가 이렇게 얘기하면서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조금 큰 상태에서 왔으면 좀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텐데..”
아기를 데리고 해외생활을 하는 것은 정말 하드코어인 것같다.
가족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해외 취업, 해외 근무를 희망했었는데 이상과 현실은 역시 달랐다, 물론 힘들기만 했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만에는 '친쯔관'이라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놀이 공공시설이 있다, 지역별로 있는데 여기서 대만인 부모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한국보다는 좀 더 많았고 아이들과 어딘가 나들이를 나갈 때 차를 소유하지 않았으나 택시나 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 한국보다 편리해서 외출을 자주 다닐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즐겁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파트 단지 내 야외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즐기고 덕분에 물에 대한 공포감이 컸던 아내와 첫째 딸은 물을 좀 더 친숙하게 여기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다. 이상을 꿈꾸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직면한 현실을 대면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같다. 가족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한국에서 복직했다. 아내 의견대로 아내는 일을 해야 힘이 나고 리프레시되는 것같아보인다.
아빠는 외국에, 가족은 고국에 있는 역 기러기 아빠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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